정책제안
교육정책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소통하는 공간입니다.
학생이 배워야 하는 까닭
- 2024.05.2214450
- 교육주제 : 초중고교육(키워드 :)관련지역 : 전국
현황 및 문제점
이 글은 문해력이 없으면 토론으로 착각하기 쉽고
또한 문해력이 없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기 십상이므로 미리 이야기를 합니다.
이 글의 핵심은 '학생이 배울 이익이 있어야 배운다. 그러므로 배울 이익을 학생이 알게, 그리고 실제로 그 이익을 가진 것을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토론할 주제도 아닙니다. 당장 헌법의 취지가 이것이고, 인권의 최우선 목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장은 어느 순간부터 '니 이익'이 아니라 '내 이익'으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많은 제안 글과 대동소이합니다. 저는 학생의 이익만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가 막힌 것을 받았습니다. 무슨 마음 레터인지 하는 것인데, 그 주제가 '공부를 해야 하는 동기'입니다.
그런데 아주 받아보고 기가 찼습니다. 이러한 것을 당당히 부끄러움도 없이 보낼 수 있는 그 수준이, 그 현실이
왜 학생이 공부를 안하는지 증명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레터는 대상이 무려 '교사용'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공부는 왜 할까요? 입니다. 이런 당당한 제목을 낼려면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수준이 압도적이라서 실제로 너를 바보로 취급할 정도가 되거나, 혹은 자신이 바보라서 상대방에 대한 개념이 없거나.
실제로 이러한 것을 성인에게 들이 댈 수준의 제목이라면, 그만큼 전문가여야만 합니다. 아니라면 성인이 읽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읽고 나서 '시간 낭비'였다면 그 책임을 져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교육'과 같은 것은 그러한 주제가 될 수조차 없습니다. 적어도 올바른 사람이라면 그걸 아예 모르거나, 남이 아예 상상도 못할 획기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암은 왜 생겨날까?' - '암세포의 변화 과정' 이런 수준에나 타당한 제목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제목을 쓴다면
보통 이러한 사람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1. 무식하고 멍청한데, (자신이 느끼기에) 더 무식하거나 멍청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상대한다.
2.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다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초등학교 수준도 못 넘어가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후...
그 증거가 여실하게 다음에 바로 드러납니다. 제목 다음 부분이 학생에게 공부는 필수이자 의무?라고 나옵니다.
자신이 압도적으로 전문적인 사람이 아니라, 멍청하고 무식해서 그런 제목을 썼구나 하는 것을 드러내 주는 증거입니다.
배웠음에도 이걸 멍청하고 무식하지 않다고 한다면 우린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지적인 솔직함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항상 이걸 무시하면 세상이 바보들이 설쳐서 망하게 됩니다.
'교사용'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제목은 '학생에게 공부를 하게 할 까닭' 이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당연히 '교사용'이니 저러한 제목을 달았다면 '교사', 감히 교육에 대해서 배운 '교사'에게 왜 배우는지에 대한 것을 직접적으로 논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학생에게 공부는 필수이자 의무라는 것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짓이 가능한 까닭은 처음 말했다시피 ,상대방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매번 상대하는 '애'랑 교사를 동급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탓에 굳이 그 불쏘시개를 다 적지는 않겠지만, 이것 역시 똑같은 법칙에 의해서 학생이 배워야 하는 까닭을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만 이기적인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조차 못하고 드러내서 당당하게 적어두었습니다.
그 헛소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를 위해서 너는 배워야 한다는 헛소리가 되는데, 당연히 이렇다면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헛소리를 일선에서 참으로 많이 듣는 헛소리이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교사가 '멍청하고 무식한 여자'에 불과함을 깨닫게 해준 소리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사람이 시간을 낭비하고, 힘을 낭비하고, 정신을 낭비하는데는 그것을 상회하는 이득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학생에게 '네가 아니라 나, 혹은 우리를 위해서' 공부하라고 하면 이것보다 공부를 하면 안되는 까닭이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이게 이해가 안 갔습니다. 공부를 해서 보답을 해야 한다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 이바지 해야 한다거나, 공부를 잘하고 선생님 말을 잘 듣는 바른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냉정하게 메타인지로 따져보면 A에게 B가 B를 위해서 A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헛소리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헛소리 따위를 위해서 해야 하는게 공부라면 당연히 내가 할 까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 이런 헛소리를 '저게' 할까? 하는 의문만 들었죠. 또 이런 헛소리는 어디서 나올까?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그 의문이 확실해 진 때는 초등학교 2학년 말이었습니다. 왜냐면 논어에 정확하게 반대로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공자'만큼 멍청하고 무식한 것이 없다라고 하면 또 몰라, 반대로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이 남을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공부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다. 배우는 것은 즐겁다. 그것은 나를 기쁘게 한다. 이렇게 적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앞의 저것'은 공자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이고 그럼 그 까닭이 있을테니 물어봤습니다. 근데 답이 없습니다. 같은 말만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했죠. 반면에 찾아보니 공자가 하는 말은 참으로 비슷한 수준의 뛰어난 사람들이 다양하게 해석을 해두었습니다. 그러니 아 정말 배움이란 건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저것'은 왜 저런 소리를 할까?
그것은 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답도 이미 논어에 있었습니다.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그런 것이죠.
그래서 저는 그 다음부터 수업은 듣지 않고, 따로 공부를 했습니다. 대놓고 멍청하고, 자기가 하는 말이 뭔지도 모르는 '것'의 쓸데없는 헛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죠. 그건 내 인생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조금 더 큰 다음에는 그런 멍청이들에 대한 기대를 접고, 대안을 제시 했음에도 무시한다면 그건 더 그럴 필요가 없죠. 니가 말하는 건 내가 이미 아는 것이고, 나는 왜 그런지 설명도 잘하는데, 너는 설명하나 제대로 못하면 그럼에도 그 말을 들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제가 항상 경청하는 것은 '질문'이지 다른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까닭입니다. 아예 '말'도 안 나오는 것과 '일단 말이 나오는 것'은 '돼지'와 '사람'의 차이입니다. 물론 자기 감정이나 짖어대는 건 이때 사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실 수업시간의 대다수는 저것에 불과하단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학생 중심같은 수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취지를 사실 잘 읽어보면, 드러나지 않는 첫번째 전제가 존재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교사가 무식하고 멍청해서'라는 전제입니다. 어차피 너가 말하나, '인강'듣나, AI가 가르쳐주나 같은 수준이라면 그걸 줄이고, 차라리 '위험해도' 경험을 늘리자는 것이거든요.
물론 이건 제 고민이기도 합니다. 진짜로 쓸 데 있는 말들은 하는데 5분이면 끝납니다. 물론 이건 인강들어도 똑같은 지식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에 이르는 과정의 설명이죠. 하지만 그 말을 하려고 40분을 더 써야 합니다. 5분 질답하면서 끝나면 되는 걸 하려고 40분을 조용히 만들고 있으니 본말 전도입니다.개선방안
플린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대가 지날수록 똑똑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세대가 지난 놀이나, 세대가 지난 사람의 쓸데 없는 말 따위를 우리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 바로 여기에 기인합니다. 물론 미묘하게 다른 게 있는데, 세대가 지났음에도 특별한 사람의 말은 당연히 새겨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제일 잘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책이죠. 굳이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냐면 없죠. 즉 쉽게 말해서, 나이 처먹은 노인네는 무시해도 되지만, 거꾸로 젊은 사람의 말은 더 살펴봐야 하고, 항상 근본을 살펴서, 내려오는 지혜 자체는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앞의 것은 멍청한 바보일수도 있지만, 그 바보가 하는 말은 옛 성현의 가르침일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어지간히 멍청하고 무식하지 않다면 성현의 가르침임을 이미 시사하니 사실 그런 것조차 안 나오면 무시해도 되긴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책'들이 나이 처먹은 노인네는 무시하더라도, 역설적으로 그 책 자체가 가장 큰 지혜인 것처럼 아주 옛날부터, 그러한 평범한 수준을 넘는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항상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책'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이 처먹은 노인네를 무시해도 되는 까닭은 그들이 그런 '책'을 아예 안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책을 보면서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운이 좋게 조금 더 그런 것을 많이 접해서 더 논해볼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아니 나이 처먹은 노인이라는 말에 발끈하지도 않겠지만요.
그런데 그래서 말 그대로 이러한 것을 깨닫고 자신이 생각을 정립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자체는 그 시대나 환경과 관계가 없이 오로지 교육, 즉 배움(남이 강제로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필요해서 하는 진짜 나의 공부)를 통해서만 나타나지만, 사회가 발전할수록 예전의 무식하고 멍청한 생각의 발로, 즉 구습이나, 고지식함의 문제는 다양하게 드러나고, 그러한 것을 그 타성에 젖어있지 않는 사람은 굉장히 쉽게 깨닫고 알게 됩니다. 이건 전체적인 경험의 소산이지, 지적인 사고의 소산이 아니라 말을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그 판단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바로 지금 학생들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어린 학생들이 거꾸로 성인들 보다 이러한 것을 더 잘 깨우칩니다. 사실 이러한 것이 초보적인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해서 우리나라가 매우 물질적인 사회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이는데, 최소한 초보적인 단계에서 천년전보단 물질적인 사회가 더 낫습니다. 왕을 위해서 멍청하게 일하는 사회는 현재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왕이 나를 위해서 배우시오라고 하면 뭔 개가 짖냐?라고 무시할 수 있는 게 지금의 학생들입니다.
즉 많은 학생들이 실제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까닭을 모르고, 이것이 바로 요즘 이야기 하는 기초학력의 근본입니다. 학교는 사회화를 위한 기관은 맞지만, 위와 같은 멍청한 것들이 생각하는 친구와 선생님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 사회화는 아닙니다. 그 근본을 나이 먹은 멍청한 것들은 잘 모르지만, 거꾸로 어린 아이들이 더 직감적으로 잘 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걸 더 잘 아는 까닭은 보통, 긍정적 이유와 경험이면 좋겠지만, 부정적인 이유와 경험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히 이 '사회화'란 민주시민을 말하는 것이지, 감정적으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두 가지의 차이를 올바르게 배우면 아니까 저런 헛소리를 하고 '내 맘을 알아주길 바라는'일은 안하겠지만, 설사 그게 아니라도 저게 잘못되었고, 니 헛소리다 싶은 것은 냉정하게 파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씁쓸하게 '교사'나 '부모'랑 똑같은 걸 더 악랄하게 배웁니다. 왜냐면 조금 더 머리가 좋으니까요.
그리고 이것은 교육의 근본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아이들이 배우려고 하지 않는 가장 큰 까닭은 그들이 '이게 나한테 도움이 안된다'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소한 그건 '니만 좋은 거'라는 것은 잘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미 틀어진 아이를 되돌리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애초에 '그런 멍청한 것'의 도움이 없이 순수하게 책을 통해서 공부를 하고 배워서 조금은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길거라고 생각을 했는데(왜냐면 시간을 줄여주니까) 거꾸로 더 자신이 지내온 세월의 억울함을 부각시켜주는 장치로 기능하기 쉬웠습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은 맞고, 수많은 자신이 당했던 대우나 처지가 실제로 억울한 것을 알게 되니까 더 억울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반쯤 닮아가는 와중에 부정 당하면 자기 자신도 부정 당하니까 더 문제가 큰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 입장 상 처음부터 그런 멍청한 것에 제대로 물든 적도 없고 배우기도 스스로 책을 통해서 배웠으니까, 부정 당할 것도 없지만(유일한 문제는 그저 무지했다는 점) 대다수의 학생들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없고,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은 똑같으니 별로 저같은 사람이 자기 편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실제로도 맞지만).
자기 말을 들으라고는 안하는 것은 좋은데 실제로 니가 알아서 생각하라고 하니 생각을 하긴 해야 하는데, 생각은 안되고, 그럼 결국 결과적으로는 앞 사람 말을 들어야 하니 다른 것도 없습니다. 기분은 배로 나쁘죠.(사실 이걸 이겨내는 것은 제일 중요합니다. 안다고 해서 그 기분이 나쁘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모르는 것을 접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저 같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일정 이상의 사고가 되지 않으면 '맨 위처럼' 냉정하게 구분해서 대하는 것이 안되고, 그렇다면 결국 다른 나머지가 합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제가 한 적도 없는 말'이나 '무식하다는 증거의 예시'로 든 것들을 저에게 따지는 경우도 많이 겪어 봤습니다. 저와 다른 누군가를 착각하는 것이죠.
결국 그게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하게 만드는 까닭이 됩니다.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왜 되는지를 알지 못하니, 그런 걸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운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반대로 가장 중점인 교육 쟁점으로 나타나고 연수받아야 합니다.
1. 교사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에게 우리가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남이 몰라서, 알아서 이득이 되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말을 들을 까닭이 생깁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마음으로는 다른 걸 하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게 개인적이라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데, 교육과 같은 데서 이러면 매우 곤란하고, 항상 '연습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모르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여기도 무식하다 멍청하다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데, 실제로 안 그런데, 즉 생각을 할 수 있고 근거를 댈 수 있는데 그렇다면 억울한 것이겠지만, 아니라면 부끄러워 해야 정상입니다. 이게 제대로 되어야 교육의 근본이 나타납니다. 내가 억지로 배워야 할 까닭은 그게 '내가 몰라서 문제'인 것이어야 배웁니다.
2. 언젠가 적었지만 내 맘대로 이래라 저래라 긍정판단 강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일 큰 문제는 그 긍정 판단이 옳음에도, 말하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서 완전히 무시 당하는 수가 생기는 것입니다. 니가 나보다 나을 거 없음 '멍청하고 무식한 거'라면 말을 안 듣습니다. 근데 긍정판단은 많은 것들이 무식한 자들의 '망상'이나 '감정의 착각'임에도, 몇 가지는 진짜로 '성현의 지혜'인 것들도 있습니다. 저는 당연히 멍청한 앞 사람과 그 말을 한 본인의 지혜를 잘 구별하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못하니 그런 것들조차 무시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럴 때 보통 그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면 보통 반대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고 판단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기대효과
최소한 두 가지가 실행이 되어야 학생은 자신이 멍청한 것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멍청하던, 아니던 그것은 관계가 없습니다. 저 두 가지가 사실 '책에서 말하는 경청'입니다. 남의 말을 귀 담아 듣고 감정적으로 맞장구쳐주라는 그딴 헛소리는 저는 제대로 된 책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경청은 나와 너의 의견을 나누어 더 큰 것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러한 기본이 되면 최소한 상대는 전적으로 무시당했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너랑 내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니 맘대로 말하고, 또 니 맘대로 결론을 내리고 그걸 강요하면 누구나 그 자체에 비정상을 감지합니다.
그러나 위의 것은 단순한 몇 가지 실행 예시에 불과합니다.
제라드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붕괴(아마 이게 맞을 것입니다.)에서 문명의 붕괴하는 까닭의 핵심으로 이것을 꼽았습니다.
이것이란 바로 어떠한 문명과 사회에서 핵심적인 이득을 가져다 주었던 가치가, 시간과 상황이 바뀜에 따라 가장 쓸모없고,
가장 문제가 되는 가치로 전락해버리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문제가 지금 여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일단 교육 자체가 그렇습니다. 교육은 전후의 쑥대밭이 되어버린 우리 나라에 한강의 기적을 가져다 주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눈에 보이는 가시적 효과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만 강조하는 착각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지금은 그때처럼 '배부르게 먹으려고' 배우던 시절이 아닙니다.
또한 그 당시의 매우 중요한 가치인 '우리'는 지금은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전체주의를 더 이상 지속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에, 우리라는 공통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너'와 '내'가 존재합니다.
배워야 하는 수준은 또 다른데, 책에서는 '너'도 없고 오로지 '나'만 존재합니다. 우리 자체가 '나'와 '나'의 공동체입니다.
배운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런 수준이 안되는 '너'가 함부로 '우리'를 이야기 하면 욕이 나오는 게 현재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책을 읽고 배우는 대신에 '그당시의 교육'으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당시의 가치'가 통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걸 '아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른', 나이 먹은 것들이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그걸 '억지로 강요하면' 당연히 학생들은 더 배울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사는 항상 그것을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취기준을 포함하여 우리가 진짜로 해야 하는 것들을 올바르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그리고 이제는 규범으로 작용되어야 겨우 가능할 정도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교육의 목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너를 위해서 내가 열심히 해야 할만큼 멍청한 것들의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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