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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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원

    교육, 훈육, 보육의 엄격한 구분과 한계 안에서 새로이 계획을 세워야 한다.

  • 2025.06.02
    3503
  • 교육주제 : 초중고교육(키워드 :)
    관련지역 : 전국
  • 현황 및 문제점

    교육, 훈육, 보육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교사라면 대학생 때 다들 배웠을 것이다.
    일단 사전을 보면 보육은 단순히 아이를 기르는 것이고 훈육은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고 교육은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게 함으로서 인격을 도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격은 착한 아이 말하는 게 아니라 지적 역량을 뜻한다.
    이 잘못된 착각에 대해서는 아예 교육 기본법 해설서에 적혀 있다. 인격은 "교육을 받은 유능한 인간"을 뜻한다.

    이를 좀 더 학문적으로 이야기 하면 이와 같다.
    보육은 학문적으로 아예 의미가 없는 이야기다. 상황만 중시하기 때문이다.
    훈육은 외재적인 변화를 그 목적성으로 둔다.
    교육은 내재적인 변화를 그 목적성으로 둔다. 그러므로 같은 변화가 일어나도 결국 원리에 따라 훈육과 교육이 나누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훈육을 교육인 것처럼 해버리면 많은 곤란한 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육에 대한 이상적인 것들이 훈육에 불과한 것에 적용이 되면 잘못된 기대와 신념이 나오는 것이다.

    매와 함께 하던 2010년 초까지의 수업과 학습은 훈육이지 교육이 아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은 적이 아예 없다. 애초에 목적으로 둔 것이 학생의 내재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오로지 방법과 기술에 의한 변화만이 중시되었다. 그 목표만은 2010년에 바뀌었으나 지금도 일상적인 학교의 모습은 훈육만 있고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굉장히 황당한 것은 똑같이 매를 가지고 했는데도 생활지도는 훈육이고 수업은 교육이라고 착각하는 점이다. 이 문제가 지금도 고스란히 그대로 적용되어서 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훈육밖에 받은 적이 없으니 내재적 변화가 없음에도, 내재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문제가 거꾸로 밖으로 표출되는 원인이 된다. 학생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지극히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지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는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훈육은 교육의 아래에 불과하기에 교육의 아래에서 훈육은 그 힘을 쓰지 못한다. 문제는 학생이 스스로 훈육을 받고 있는데 교육을 받는다고 착각을 하게 되면 당연히 이 것은 어긋난 착각이지만 착각이라고 해서 그 문제가 변하지 않는데 있다.
    예를 들어 보자. 학생이 싫은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억지로 줄을 서는 것은 훈육에 해당된다. 학생의 인성은 변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는 훈육이기에 치밀한 논박과 같은 인지 구조를 바꾸는 근본적 작업이 전혀 없다. 훈육은 단지 행동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학생이 스스로 내가 교육을 받았다고 착각하면 굉장히 잘못된 문제가 성립한다. 자기 실패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때 학생이 줄을 잘 서지 못하면 그 원인은 100% 사회와 타인에게 존재하지 학생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훈육의 기본 법칙이다. 학생에게 이 원인을 돌리면 그 때 나오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학생은 왜 그래야 하는지 근본적으로 전혀 깨달은 바가 없다. 오로지 행동으로 습관화를 시킨 것 뿐이고, 이러한 습관이 깨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냥 그게 훈육, 즉 도구적 학습의 한계다.

    그런데 이 잘못된 훈육의 이름이 교육이 되니 학생은 자기 스스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이 두려움이 거꾸로 학생을 더 힘들게 만든다. 또 학교 안의 많은 다른 사람들도 착각을 한다. 교육을 받고 나서 학생은 처음으로 자아 비판의 자격을 가지게 되는데도 학생의 기질, 성격을 탓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오로지 학생은 행동만을 문제 삼을 수 있다. 즉 줄 서는 행위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학생이 줄 서지 않는 근본적인 성격은 문제가 될 수 없다. 실제 이게 강제적 규칙의 한계로 당연히 강제적 규칙, 사회적 관계는 이 근본을 따지는 일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어떤 학생이 자신의 근본적인 성질이나 성향을 문제 삼음 당했을 때 화가 나서 몽둥이로 교사를 두들겨 패면 그것은 옳은 것일까? 이게 가장 따져봐야 하는 근본적 핵심인 것이다. 당연히 그 행동은 옳지 않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학생의 인성에는 문제가 없다. 학생은 교육적으로 배울 기회를 가진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이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은 근본 오류에 따라서 기질적인 것만 보는데(대표적인 것이 전교조 관련이다), 이러한 수정 배경은 못 배운 자들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가 더 기저에 깔려 있다. 예를 들면 1994년 지존파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러한 반사회적인 범죄는 교육 말고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 단순한 상식으로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교육, 즉 학교가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아서 그 책임을 묻고 바꾸자한 것이 바로 지금의 교육 과정이다. 그러나 바뀐 것은 제도일 뿐,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동일한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다시 말하지만 훈육이 교육으로 착각되는 데서 비롯된다.

    개선방안

    그러므로 교육과 훈육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그 기대치를 정확하게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은 매우 어렵지만 그 기대치는 무한하다. 교육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99%의 훈육에 대해서는 너무 과하고 힘든 기대치에 불과하다. 심지어 교육이 이루어질 가능성이라도 있는 곳은 초등학교에 불과하고 사실 중학교 이상은 초등학교 때 어떤 상태였는지에 따라 아예 교육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교육은 인지적 변화가 없으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학생에게 줄 서라고 이야기해서 줄 잘 서던 아이가 어느 순간 안 서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 이를 학습 용어로 소거라고 부른다. 당연한 행위가 일어났다. 교사가 호되게 학생을 질책 했는데 듣지 않고 대신에 뎀프시롤로 보답했다. 딱히 이것도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다. 자극 변별 실패에 따른 현상이다. 잘 들을거라고 기대할 것도 없고, 나아졌다고 착각할 일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여기지 않는 순간에 문제가 발생한다. 주의를 기울이라고 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하라고 한들 조용히 하지 않는다. 이걸 습관화라고 한다. 이를 위해서 탈 습관화를 위한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강력한 몽둥이와 같은 것으로 간격 비율 처벌 계획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당연히 내면화가 되지 않으면 언제 바뀔지 모른다.

    이 내면화를 돕는 것이 원래 몽둥이였다. 몽둥이로 사람을 패면 성격이 변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게 되는데 이 까닭은 다른데 있는게 아니다. 그저 얻어맞는 것이 일으키는 인지 부조화로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얻어맞다 보면 부조화를 바꾸기 위해서 태도를 바꾸어서 아 내가 잘못했다 고쳐야겠다라는 내재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몽둥이가 없다면 이런 식으로 바뀌는 일은 없다. 바꾸는 게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므로 금방 돌아가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똥군기의 극치였던 예전 군대다. 멀쩡한 대학생들이 그렇게 바뀌는 게 이상한가? 걱정하지 마라 짐바르도의 실험에서는 그 스탠포드 대학교의 2학년 학생들도 순식간에 말 못할 짐승으로 변했다. 이게 몽둥이와 권력이 가져다 주는 내재적 변화다.

    그런데 지금은 훈육의 핵심인 몽둥이가 없으니 아이들이 변할 수가 없다. 내재적 변화가 불가능한 것이다. 오로지 사회적 관계에 의거한 변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별 효과가 없다. 그럼 끝인 것이다. 이게 지금 현실이다.
    결국 그렇다면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제대로 교육을 해야 하는데 교육이 되고 있지 않다.
    아니 차라리 시도라도 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훈육이 교육의 탈을 쓰고 있으니 가능한 것이 아예 없다.

    훈육의 핵심은 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나 소나 돼지도 가능한 게 훈육이고, 교육은 사람만이 가능함을 전제로 한다.
    그 차이를 올바르게 일단 알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항상 생활지도 따위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차피 그건 지금 당장을 제외하면 아무 쓸모가 없다. 그게 정상인데 다르게 착각하면 착각하는 자의 무지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이름은 '교사'다. 훈련사가 아니다. 그러나 하는 것은 훈육이고, 기대만 교육으로 하고 있다. 이 문제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당장 고시에서 나오는 안일함도 거기에서 존재한다. 교육을 한다고 착각을 하기에 학생이 진정으로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변한다면 당연히 변함에 수반되는 물리적 증거들이 필요하다. 교사의 착각은 그 증거가 아니다.

    개선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훈육과 교육을 구분하고 훈육의 한계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훈육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필요한 것이지, 교육처럼 인생을 좌우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지금, 바로 이곳에서 훈육이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다른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역으로 항상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듯 학교에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훈육은 지금 여기를 위한 것인데 내가 학교에 오는 까닭은 미래를 위해서니 말이 안 맞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핵심을 몰라서 훈육이 얼마나 가벼운 기대치를 갖는지를 몰라서 문제를 키운다.
    해라고 하는데 안하면 바로 다른 조치가 필요하다. 다른 말이 필요가 없는데 훈육의 가치는 애초에 그 순간을 못 벗어난다.

    다음으로 훈육은 수단에 불과하지 그 목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학교는 교육을 위한 곳이지 훈육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려면 반대로 반드시 올바른 교육이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도 둘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은 내재적이어야 한다. 외재적인 것은 그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아예 기준부터가 외재적이라서 있을 수가 없다. 무슨 말이냐고? 당장 당신 학교 계획을 보라. 전부 외재적인, 심지어 심하면 탁상행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내재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항상 쓸데없는 행사 따위에나 눈이 돌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1960년대부터 내려온 "훈육"적 계획에 불과하다. 당장 그 이후에 한번이라도 제대로 바뀐 적도 없다. 그러므로 이 계획이 외국처럼(예를 들어 유급제도) 완전히 바뀌어야 올바른 교육의 첫걸음이 가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항상 훈육과 교육을 연결시켜야 한다. 훈육을 교육인 척 해서는 안되고, 훈육을 교육과 연결시켜서 그 때만 훈육이 가능하게 제도를 정비해야만 한다. 즉 학교는 교육을 위한 곳이고, 교육을 위한 수업만이 학교의 존재가치임을 천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학생들도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의미도 없는 훈육이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기대효과

    항상 기초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문제를 들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난해하고, 성격이 안 맞다는 말을 한다.
    그 까닭 역시 바로 훈육을 교육으로 착각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훈육은 단조로운 행동 기반이지만, 교육은 그 반대다.
    그러니 항상 왜 그런지를 생각하고 그 인지 구조를 기반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훈육을 당했지 교육을 배운 적이 없다. 배운 적이 아예 없다. 2000년대 이전의 학교에서 나는 아니라고 착각하는 것은 지적인 문제가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당신이 훈육당한 동물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그런 학교는 아무 데도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그렇게 교육이란 이름으로 훈육당한 사람들이 만드는 너무나 간단한 문제이다.
    그 관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푸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그 근본이 이 잘못된 사기에 있음은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결국 뭐냐 싶은데 핵심은 간단하다.
    1. 학교 교육 계획을 외재적 행사가 아니라 내재적 변화 위주로 세울 것(아니면 세우지 말 것)
    2. 훈육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고 적정 기대를 하고 반응할 것.
    3. 수업은 주관적이고 개별로, 역으로 행동은 객관적이고 단체적으로 파악할 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사람은 다 똑같고(동물이고), 이를 수업과 같은 교육을 통해서만 개별화(사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이 되고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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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댓글 3
포로로리 2025.11.0117:10
지금 학교 현장은 ‘교육’보다는 여전히 ‘훈육’ 중심이라는 말에 공감돼요. 행동 통제보다 사고를 바꾸는 진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togethersch 2025.06.1821:45
학생을 지도하는 것에 대해 참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khiy2k 2025.06.1409:42
반성문도 함부로 쓰게 할 수 없는 현실에 무기력함을 느낍니다.